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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성격 인성 왕세자 나이 부인 아내 아들 자녀,만년필 짜증

- 찰스 3세 관련 보도들!

10세에 왕세자, 74세에 왕이 된 찰스.. "어머니처럼 평생 헌신할 것"
- 2022.09.13

지난 8일(현지 시각)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며 왕위를 계승한 찰스 3세(74)는 9일 첫 TV 대국민 연설에서 “평생 헌신하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을 오늘 여러분에게 되풀이하겠다”며 “충성심과 존중, 사랑으로 영국인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즉위위원회는 10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궁에서 열린 즉위식에서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는 찰스 3세 국왕이 됐다”고 공식 선포했답니다.


찰스 3세의 즉위 과정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최대가 되는 시기를 뜻하는 ‘스프링 타이드(spring tide·사리) 작전’으로 명명됐다. 그는 12일부터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웨일스 등 영국 연방의 자치 지역을 차례로 방문해 추도 예배에 참석하는데, 이 과정이 ‘스프링 타이드’ 작전의 핵심으로 꼽힌다.

찰스 3세는 10살이던 1958년 영국 왕세자로 책봉된 이래 64년간 즉위를 기다리다 최고령으로 영국 왕위에 올랐다. 일찌감치 왕세자로 낙점된 만큼 오랜 시간 환경과 문화재 보호 분야 등에서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펼쳤지만,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에 비해 국민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영국인들이 등을 돌린 결정적인 사건은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이혼이었다.

찰스 3세는 1981년 당시 스무 살이었던 다이애나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고 윌리엄과 해리, 두 왕자를 낳았지만 1996년 결국 이혼했다. 이 과정에서 찰스 3세가 전 연인이었던 커밀라와 결혼 후에도 불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국민의 공분을 샀다. 영국인들은 불행한 사생활에도 사회봉사에 늘 앞장섰던 다이애나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다이애나는 이혼 이듬해인 1997년 8월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다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 추모 열기가 영국 전역을 뒤덮었고, 동시에 국민의 분노가 찰스 3세를 향했다. 찰스 3세는 2005년 현 왕비인 커밀라와 결혼했다. 다이애나를 그리워하는 많은 영국인은 여전히 찰스 3세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낸답니다.

영국 매체들은 찰스 3세가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군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텔레그래프는 “찰스 3세가 오랜 시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싸워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고, 더 타임스는 “찰스 3세는 리즈 트러스 총리와 만나는 자리에서 국정 현안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힐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국왕 즉위를 오랫동안 준비해 온 만큼 긍정적인 전망도 나온다. 왕실 평론가인 로버트 하드먼은 BBC 인터뷰에서 “여왕도 그랬지만, 지금 국왕도 누구보다 오래 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찰스 3세는 왕실의 각종 재산을 관장하게 되지만, 왕위 계승과 함께 자신의 명의로 물려받는 재산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왕실 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280억달러(약 39조원)로 추산되는데, 대부분이 왕실을 운영하는 재단인 ‘크라운 에스테이트’ 소유다. 찰스 3세가 물려받는 자산은 엘리자베스 2세의 개인 자산인 5억달러 중 일부 금액이 될 전망이랍니다.

찰스 3세 즉위 "여왕처럼 헌신"..국민 반감도 적지 않아
- 2022.09.12

영국 즉위위원회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이틀 만인 10일(현지 시간) 장남 찰스 3세를 국왕으로 공식 선포했다. 찰스 3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한 당일(8일) 자동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9일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를 접견하며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찰스 3세는 첫 대국민 연설에서 “여왕이 변함없이 헌신했던 것처럼 나도 내게 허락된 시간 동안 충성심과 존경, 사랑으로 국민을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 역사상 최고령(74세)으로 국왕에 올랐다.

영국은 왕과 관련된 상징물을 모두 교체할 예정이다. 군주가 머무는 곳에 거는 왕실 깃발 ‘로열 스탠더드’, 영국 관공서 깃발에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상징 문장과 영어 약자인 ‘EIIR’(Elizabeth Ⅱ Regina)가 찰스 3세의 것으로 바뀐다. 영국 국가인 ‘하느님, 여왕을 지켜 주소서(God Save the Queen)’의 제목과 가사에 나오는 ‘여왕(Queen)’은 ‘왕(King)’으로 바뀐다.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영국 파운드화 지폐와 동전도 새로 찍는다. 교체 대상인 화폐의 액면가를 합하면 110조 원 규모에 달해 교체 작업에 최소 2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답니다.

영국 BBC는 찰스 3세에 대해 “수줍음이 많고 예민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바쁜 어머니와 엄한 아버지(필립 공) 아래서 살가운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청중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어린이들에게 해리포터 시리즈를 구연동화처럼 읽어주는 자상한 면모도 가졌다.

그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처럼 영국인에게 사랑받는 군주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찰스 3세의 현 부인인 커밀라 파커볼스 왕비는 2005년 재혼한 배우자다. 전 부인은 생전 영국 국민들의 ‘슈퍼스타’로 통했던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 찰스 3세는 1981년 다이애나와 결혼했으나 당시 유부녀였던 커밀라 왕비와 불륜 관계를 유지하다 1996년 다이애나와 이혼했다. 1년 뒤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다 교통사고로 숨지자 찰스 3세는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왕위 계승 서열에서 그를 빼야 한다”는 요구까지 일었다.

현재도 찰스 3세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다. 런던에서 만난 택시 운전사 카릴 씨는 본보에 “새 국왕이 옛날에 다이애나를 버리고 카밀라와 재혼했기 때문에 다들 싫어한다. 다이애나가 살아있다면 오히려 그녀가 여왕이 될 만했다”고 말했답니다.

11일 옥스퍼드와 에딘버러에서는 시위대가 “누가 찰스를 국왕으로 뽑았느냐”고 외치며 항의하다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홍콩 시민들 "굿바이, 보스 레이디" 추모 열기
- 2022.09.14

150년 넘게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시민 수천명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영국 총영사관 앞으로 몰려들었다고 현지 언론이 13일 보도했다. 홍콩 시민들은 30도가 넘는 더운 날씨에도 추모글을 남기기 위해 4시간씩 줄을 섰답니다.

지난 8일 여왕이 서거하자 홍콩 주재 영국 총영사관은 입구에 추모의 글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9일부터 16일까지 조문객을 받고 있다. 중추절(중국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12일에는 낮 기온이 34도까지 치솟았지만, 홍콩인 수천명이 꽃과 여왕의 사진, 영국 국기를 들고 찾아와 수백m 장사진을 이뤘다. 시민 에밀리 응(30)씨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할머니로부터 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 친근하게 느껴진다”며 “영국 왕실 앞으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친절하고 겸손한 내용의 답장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영국 총영사관 측은 12일 하루 2500여 명이 추모의 글을 남겼다고 밝혔다. 추모글 작성은 매일 오후 4시까지만 할 수 있지만, 총영사관 앞에는 이날 밤늦게까지 조문객 발길이 이어졌다.

홍콩은 1841년부터 영국 통치를 받다가 1997년 중국에 반환됐다. 중국 당국은 영국의 홍콩 지배를 ‘100년의 국치(國恥)’라고 부른다. 하지만 두 딸과 함께 영국 총영사관을 찾은 홍콩 시민 위안(袁)모씨는 명보에 “여왕은 매력적인 지도자였다. 홍콩이 (영국) 식민지 시절 발전을 이뤄 국제 도시가 되고, 시민이 자유를 누리는 데는 그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며 “그는 홍콩 역사의 일부”라고 했다. 홍콩에서 ‘보스 레이디’라는 별명으로 불린 여왕은 1975년과 1986년 두 차례 홍콩을 방문했답니다.

홍콩의 여왕 추모 열기는 중국의 ‘전면적 통치’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불안과 우려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1997년 홍콩 반환 후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로 홍콩 내정에 거리를 뒀던 중국은 2019년 대규모 반중 시위를 계기로 홍콩 국가보안법, 선거제 개편을 통해 직접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민주당 등 야당과 자유주의 성향 시민단체, 언론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제프 로(37)씨는 SCMP에 “여왕의 서거로 한 시대가 끝났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현재 홍콩 상황 때문인지 지금은 다르게 느껴진다”고 했다.

한국·미국 등 각국 정상이 여왕을 추모하기 위해 영국을 찾을 계획인 가운데 중국은 조전으로 갈음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리커창 총리는 지난 9일 각각 찰스 3세와 리즈 트러스 총리에게 조전을 보냈다. 왕치산 국가 부주석은 12일 베이징 영국 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북아일랜드, 여왕서거에 신구교도 지역 주민들 희비 엇갈려
- 2022.09.14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를 두고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의 신구교도 분쟁지역인 폴스 로드와 샨킬 로드사이의 불과 10분 걸리는 도보거리 사이에서 희비가 극렬하게 엇갈리고 있다.

과거 신구교도들 사이의 유혈 투쟁의 최전선이었던 이 곳에서는 아직도 가까운 거리에서 가톨릭신자들과 신교도들이 분리된 채 모여 살고 있지만, 주민들은 영국 여왕을 대하는 마음의 거리만은 1000마일이 넘는다고 말한다.

찰스3세 새 국왕이 모친의 서거로 왕위에 오른 뒤 13일 북아일랜드를 순방했을 때 주민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유혈 정치투쟁이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있는 이들의 감정은 매우 복잡하답니다.

영국 왕실에 오랜 충성을 바쳐온 신교도 주민들의 중심거리인 샨킬 거리의 주민들은 상점과 가로수 기둥마다 영국 국기를 내 걸고 젊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그린 대형 벽화 앞에 꽃다발과 슬픔에 젖은 손편지들을 가져다 놓았다.

수 십년간 유혈충돌이 계속된 북아일랜드의 치안유지를 위해 영국군이 산하에 설치했던 얼스터 방어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재클린 험프리스(58)는 " 우리는 여왕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지금도 여왕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했다.

"찰스왕도 훌륭하게 소임을 다할 것이다. 여왕께서 훈련을 잘 시켰으니까"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이 곳에서 800m거리에 있는 과거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본거지이자 영국군에 대항하는 게릴라부대가 있었던 폴스 거리에서는 13일 출근하던 시민들이 "찰스왕의 방문으로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정당화 되는 건 아니다"라고 일축했답니다.

출근하던 폴 워커(55)는 1981년 감옥에서 옥중단식으로 사망한 IRA유격대의 바비 샌즈의 초상화가 그려진 3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벽화 앞에서 " 영국이 뭐라고 믿고 있든 간에 우리는 아직도 향후 아일랜드의 통일을 쟁취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52세의 바비 존스도 "찰스는 우리 왕이 아니다. 여기서는 바비 샌즈가 우리 왕이다. 여왕이든 영국 왕가의 누구든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엘리자베스 2세가 그래도 이곳에서 애정은 아니라도 존경심의 대상은 된다면서, 그 이유는 2012년에 과거 IRA사령관이었다가 북아일랜드 자치구의 부총리로 취임한 마르틴 맥기네스와 악수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찰스는 환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13일 이 곳에 도착한 찰스3세 국왕은 북아일랜드 정부의 관리들에게 여왕의 서거에 조문해 준것을 감사하고 여왕의 북아일랜드와의 화해 노력을 인정해 준 것을 치하했다.

하지만 찰스왕이 어머니가 얻은 이 곳의 호의로 덕을 볼 것 같지는 않다. 여왕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꾸준히 한결같은 통치력과 관심을 유지하면서 평판을 쌓았지만 찰스는 거의 외톨이로 살았고, 영국내에서 치열한 왕위 쟁탈전으로 분열된 왕가의 왕위 계승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대부분 지역은 치열한 게릴라전 끝에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북아일랜드는 대다수 주민들이 신교도인데다 영국을 좋아해서 영국 영토의 일부로 남아있었다.

이 불안한 평화는 1969년 소수인 가톨릭계 주민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시위를 시작해 내전으로 폭발했고 영국군은 표면적으로는 구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투입했습니다.

폴스 거리에 있는 IRA역사박물관에는 당시 신문인 '아일랜드 뉴스' 1면에 게재된 " 영국군, 최소 4개월간 이 곳에 주둔할 듯"이라는 기사가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영국군은 거의 30년 동안 이 곳에 주둔하면서 결국 3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반정부투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 곳 사람들은 아직도 당시의 유혈사태와 악몽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우체국 직원인 대미안 번스는 " 영국군이나 경찰관을 보면 우리는 무조건 달아났다. 그들에게는 우리는 무고한 주민이 아니라 범죄자였으니까"라고 말했다.

당시 IRA와 연계된 신페인 당 사무실들은 지금은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최대의 세력이 집결하는 장소로 변했다.

이 곳 신페인 서점에서는 샌즈의 초상화 포스터에 " 영국은 아일래드 땅에서 당장 나가라!"는 구호가 쓰여 있는 것을 아직도 팔고 있다.

영국 왕실도 북아일랜드 사태의 피해를 면할 수는 없었다. 1979년 IRA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절친한 사촌인 루이스 바우트패븐경을 낚시배에 폭탄을 장치해 암살했다. 이 때 다른 3명도 사망했다.

북아일랜드의 양대 진영은 1998년 마침내 ' 성금요일 협정' ( Good Friday Agreement)을 맺고 "평화선"을 만들어 폴스 거리와 샨킬 거리 양쪽으로 나누어 살게되었다. 두 지역사이에는 높은 담장과 철문이 설치되어 아직도 밤이면 통행이 차단된다.

25년전만 해도 여왕은 영국의 압제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이 곳 주민들도 언젠가는 하나의 아일랜드가 탄생할 것을 믿으며 "결국 여왕도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할머니 아닌가"하는 선에서 여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곳 주민들은 영국군의 총수인 여왕과 새 왕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음속 깊이 불편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法宮 버킹엄궁 꺼리는 찰스3세, 어디에서 살까
- 2022.09.13

선왕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관습적 법궁(法宮)인 버킹엄궁에서 거주했지만, 찰스 3세는 버킹엄궁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찰스 3세가 수없이 많은 궁전·주택·별장 중 어디에 살아야 할지가 관심사가 됐다고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가 12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찰스 3세는 왕세자 시절 커밀라 당시 콘월 공작부인과 함께 런던 중심지 몰 거리에 있는 저택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살았다. 이제 왕이 된 찰스 3세는 지난 183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이후 대대로 영국 왕실의 법궁이었던 버킹엄궁으로 옮기는 것이 순리지만, 찰스 3세가 버킹엄궁에 가진 반감이 커 버킹엄궁을 주거지가 아닌 집무실로 사용할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찰스 3세를 잘 아는 소식통은 그가 세인트 제임스궁 바로 옆 클래런스 하우스를 런던의 거주지로 이용하고 버킹엄궁은 연회나 리셉션 같은 행사장 겸 왕실의 본부로 사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찰스 3세는 버킹엄궁을 대중에 더 많이 개방하는 방안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다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즉위 후 남편 필립공과 함께 살던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나와 버킹엄궁으로 들어가길 꺼렸던 역사가 있다. 당시 여왕의 부군이었던 필립공 역시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계속 지내고 버킹엄궁은 업무용으로 쓰자고 제안했었지만, 버킹엄궁의 궁정 관리들은 버킹엄궁이 왕실의 전통적인 주거지이므로 여왕 부부도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찰스 3세도 이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

찰스 3세는 왕세자 시절에도 수많은 주거시설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왕위에 오르면서 선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재산까지 물려받아 이제는 전국 도처에 널린 집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중 찰스 왕이 가장 사랑하는 휴가철 거주지는 잉글랜드 서남부 글로스터셔의 하이그로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신혼 시절의 찰스 왕세자(당시)와 다이애나 빈이 두 자녀와 함께 주말을 보내던 추억이 깃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콘월 공작령이라 이제 콘월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윌리엄 왕세자의 소유가 된 데다, 커밀라 왕비는 다이애나 빈의 자취가 배어 있는 이곳에 대한 애착이 덜한 편이어서 찰스 국왕이 앞으로도 즐겨 찾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찰스 왕이 휴가철에 이용할 수 있는 주거시설로는 이밖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스코틀랜드 동북부 밸모럴성과 잉글랜드 동부 샌드링엄의 샌드링엄 하우스, 웨일스 리니워모드 별장 등이 있답니다.

소식통은 그러나 찰스 3세가 왕실의 비용 절감을 추구하고 있다면서 “더 많은 왕실의 주거 시설을 대중에 개방하고 그 수입으로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 해결책일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왕국(UK)' 유지가 관건.. 찰스 3세, 국민통합 '안간힘'
- 2022.09.14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서거 후 그를 자국 국가원수로 모셔 온 영연방 14개국의 동향에 국제사회 시선이 쏠리지만 정작 영국의 고민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카리브해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들이 영국 국왕을 섬기든 말든 당장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그리고 웨일스로 구성된 ‘연합왕국’(UK·United Kingdom) 자체를 지켜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反)잉글랜드, 반영국 정서는 분리독립 추진으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새 국왕 찰스 3세는 모친의 국장(國葬)을 준비하는 기간에도 틈틈이 이들 지역 인사들과 접촉하며 영국의 통합을 유지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영국 새 국왕 찰스 3세(왼쪽 두 번째)가 13일(현지시간) 벨파스트 힐스보로성에서 북아일랜드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고 있다. 오른쪽부터 미셸 오닐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부수반, 알렉스 마스키 북아일랜드 의회 의장. 두 사람 다 영국에 비판적이고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지지하는 신페인당 소속이다. 벨파스트=AP연합뉴스

13일(현지시간) 찰스 3세와 부인 커밀라 왕비는 여왕의 시신이 안치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비행기를 타고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로 건너갔다. 명목은 북아일랜드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엘리자베스 2세 서거에 대한 조문을 받는 것이지만, 속내는 영국이 유럽연합(EU)을 탈퇴한 브렉시트 이후 갈수록 악화하는 민심을 다독이는 데 있었다.

AP 통신은 찰스 3세가 벨파스트 힐스보로성(城)에서 미셸 오닐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부수반, 알렉스 마스키 북아일랜드 의회 의장 등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오닐과 마스키는 둘 다 신페인당 소속이다. 신페인당은 민주연합당(DUP)과 더불어 북아일랜드의 양대 정당인데, 연합왕국을 지지하고 북아일랜드가 계속 영국 일부로 남길 원하는 DUP와 반대로 북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벗어나 아일랜드와 통합하길 강력히 희망한다. 영국 입장에선 보면 분리주의 세력인 셈이다.

영국이 EU 회원국이던 시절엔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 사이에 마치 국경이 없는 것처럼 양국 주민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다. 하지만 브렉시트를 계기로 이런 북아일랜드의 지위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현지 분위기는 영국에서 탈퇴해 아일랜드와 합침으로써 계속 EU 역내에 남아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실정이다. 조만간 주민들을 상대로 그 여부를 묻는 투표를 실시하려는 움직임까지 본격화하고 있다. 찰스 3세로선 어떻게든 이를 막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ㄹㅂ니다.

여왕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서거한 밸모럴성이 있는 스코틀랜드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엘리자베스 2세 재위 중인 2014년에 이미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된 바 있다. 비록 부결되긴 했으나 이 지역의 중심 정당인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이르면 내년 10월 중 다시 주민투표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스코틀랜드 역시 과거 EU로부터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는데, 브렉시트로 이게 뚝 끊기자 영국 중앙정부를 향한 불만이 고조돼왔다.

찰스 3세는 신임 국왕으로서 리즈 트러스 총리를 공식 접견한 지 하루 만인 지난 10일 버킹엄궁에서 SNP의 이안 블랙포드 하원 원내대표와 만나 환담했다. 그는 여왕이 생전에 스코틀랜드를 무척 사랑한 점, 그래서 삶도 스코틀랜드에서 마감한 점 등을 언급함으로써 은연중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분리될 수 없는 ‘한몸’이란 점을 암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엘리자베스 2세가 스코틀랜드에 머물다 서거한 사실이 향후 영국의 국민통합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여왕의 시신이 에든버러에 머무는 동안 주민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BBC가 “시신이 안치된 성당 안에 입장하기 위해 줄잡아 1만명 넘는 시민이 나와 줄을 섰다”고 전했을 정도다. 여왕 추모 열기가 뜨거울수록 스코틀랜드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는 줄어들 것이란 게 영국 언론의 분석이다.

"빌어먹을 잉크" 찰스 3세 또 짜증.. 만년필에 '진심'인 탓?
- 2022.09.14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즉위 이후 문서에 펜으로 서명하는 과정에서 연이어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찰스 3세가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모습에 일부 ‘만년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짜증 날 만도 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역사적인 공식 문서에 서명할 경우 고급 만년필을 쓰는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에 따른 즉위선언 행사 당시 책상에 놓였던 펜은 저가 제품으로 격식에 걸맞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분노의 원인은 ‘의전 실패’ 탓이라는 해석이었다.

다만 그렇다 해도 찰스 3세 국왕이 역사적인 순간에 얼굴을 붉히며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건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잉크 묻자 ‘벌컥’한 찰스 3세… “허구한 날 말이지”

13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찰스 3세는 이날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인근 힐스버러성을 방문해 방명록에 서명하는 도중 펜의 잉크가 손에 묻자 짜증을 냈다.

SNS 등 온라인상에 올라온 영상에 따르면 찰스 3세는 이날 손에 묻은 잉크를 보면서 “너무 싫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커밀라 왕비가 펜을 받아든 뒤 “여기저기 흘렀네”라고 말을 받았다.

찰스 3세는 다시 “이런 빌어먹을 것은 못 참겠다”며 “허구한 날 말이지”라고 거칠게 말했다. 이날 찰스 3세는 서명을 하고 나서 보좌관에게 “오늘이 9월 12일인가”라고 물었고 보좌관은 “13일입니다, 폐하”라고 대답하자 “어이구, 날짜를 잘못 썼네”라며 다시 쓰기도 했다.

찰스 3세는 지난 10일 세인트 제임스궁에서 열린 즉위위원회 행사에서도 문서에 서명을 하며 책상 위의 펜대를 치우라는 듯이 여러 차례 짜증스럽게 손을 내젓는 모습이 영상에 포착됐다.

찰스 3세는 즉위 선언문에 서명하는 과정에서 책상에 놓여 있던 만년필 통을 치우라고 손짓했고, 수행원은 즉시 이를 책상에서 치웠다. 찰스 3세는 미리 준비된 펜을 쓰지 않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만년필을 꺼내 잉크병에 담가 잉크를 묻힌 뒤 문서에 서명했다. 찰스 3세가 이때 사용한 만년필은 고가의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6 솔리테어 르그랑’ 모델인 것으로 전해졌다. 가격은 1620유로(한화 약 220만원) 정도다.

트위터에서는 즉위 선언식 당시 책상에 올라온 펜이 일본 파이롯트(Pilot)사에서 만든 저가의 브이펜(V-pen)이라는 내용이 회자되기도 했다. 찰스 3세가 역사적인 의전 행사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올라와 있는 걸 보고 분통을 터뜨린 게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해외의 한 트위터 사용자는 “영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누군가 적절한 펜을 제공하는 걸 잊어버렸다”며 찰스 3세가 아닌 다른 인물이 즉위 선언식에서 브이펜을 쥐고 서명하는 모습의 사진을 올렸다.

만년필 마니아라고 밝힌 국내의 한 누리꾼도 13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만년필 덕후가 인정하는 찰스 3세의 착한 빡침’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저건 진짜 의전 담당이 선을 넘었다”며 “찰스 3세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우라고 짜증을 낸 트레이에 있는 만년필은 3000~4000원 정도 하는 일본 파이롯트사의 브이펜이었다”고 지적했답니다.

누리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한 누리꾼은 “사랑하는 어머니가 떠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게 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의전 문제가 있었으니 감정 조절 못한 게 이해가 된다”고 했다. “팬 마니아로서 저런 자리에 저런 펜을 놔둔 건 선을 넘은 거다” “명백한 의전 실패” “이렇게 보니 또 이해가 가긴 하네”라는 반응도 이어졌습니다.

반면 비판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한 누리꾼은 “평생 이미지를 관리해야 하는 왕실 인사가 카메라 앞에서 기분대로 행동한 것”이라며 “근엄한 군주가 아니라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일반인이라고 스스로 외친 것”이라고 꼬집었다. 다른 누리꾼은 “펜의 의미가 아무리 중요해도 저런 자리에서 짜증 내는 행동이 옳게 보이진 않는다”고 지적했다.